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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안내]복거 한밭 |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09-28 | 조회수 | 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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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위치한 분지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의 식장산부터 고봉산,함각산,개머리산,계족산 등의 줄기가 이어지며 서북쪽으로는 금병산,우산봉,도덕봉,백운봉 등 계룡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계가 논산시 두마면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쪽으로는 보문산이 주봉이 되어 산지가 형성되고, 이런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를 유등천과 갑천, 대전천 등 3대 하천이 흐르면서 그 주변에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강과 그 주변의 구릉과 산지를 기반으로 대전 지방의 사람들은 선사시대부터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삶을 이어 왔다. 둔산동의 선사유적은 기원전 2000년~1000년에 속하는 유적으로 농경과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다. 둔산동 일대의 구석기 신석기 유적, 괴정동·탄방동 일대의 청동기 유적, 유성의 계산동·대정동 부근의 신흔국(후한서 동이전)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회덕현으로 본래 백제의 통일신라에서 비풍군으로 고쳤고, 고려 시대 공주목 회덕현으로 고쳐 공주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회덕현 진잠현이 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회덕군 진잠군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공주 동쪽에서 금강 언덕을 따라 가다가 계룡산 뒤에서 큰 고개를 넘으면 유성 큰 들판이 나서니 곧 계룡산의 동북방이다. 계룡산 남쪽 마을은 조선 건국 초기에 도읍을 정하려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이 골짜기 물이 온 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면서 진산,옥계의 물과 합치고 북쪽으로 금강으로 흘러드는데 이 냇물 이름이 갑천이다. 냇물 동쪽은 회덕현이고 서쪽은 유성촌과 진잠현이다. 동서 양쪽의 산이 남쪽으로 들판을 감싸 안으며 북쪽에 와서는 서로 교차되어 사방을 고리처럼 둘러막았다. 들 가운데는 평평한 둔덕이 구불구불하게 뻗었고 산기슭이 깨끗하고 빼어나다. 구봉산과 보문산은 남쪽에 불끈 솟아 막고 밝은 기상이다. 전지가 아주 좋고 넓으나 바다가 조금 멀어 서쪽으로 강경의 교역에 힘입는데 강경까지는 백 리이다. 고개를 떠나 들판에 내려앉은 시냇가 마을은 이루다 손가락을 꼽을 수 없다. 갑천은 들판이 아주 넓고 사방 산이 맑고 화려하다. 세가닥 큰 냇물이 들 복판에서 합류하여 관개할 수가 있다. 영원히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라고 하였다.
1970년 12월 3일 호남 고속도로 개통(대전-전주)으로 명실상부한 교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대전은 5개구 (대덕구, 동구, 중구, 서구, 유성구)가 있으며 남선공원은 대전 지형의 중심이다. 국가하천으로 금강 갑천, 유등천, 대전천 지방하천으로 주원천, 두계천, 매노천, 진잠천등 하천비율이 높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가 개발되어 서울의 한국과학기술원이 이전해 옴에 따라 과학기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덕군과 유성군을 통합하여 인구 백만 명을 돌파하여 대전직할시로 승격 충청남도에서 분리되었고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가 개최되어 과학기술 도시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다.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8년 정부청사에 중앙행정기관이 대거 이전해 왔다. 1995년 서구의 둔산 신도시가 개발되고, 1999년 시청이 중구 대흥동에서 둔산 신도시로 이전하였다. 대전 인구수는 2021년기준 약 145만여명으로 인구를 기준으로 볼 때 서울, 부산, 인천, 대구에 이어 다섯 번째이다. 특히 서구의 둔산 개발, 시청 이전 등으로 전체 인구 중 서구의 상주인구가 20만 중후반대로 대전의 부촌으로 떠올랐으나 2000년대 이후로 노은지구나 도안 신도시 개발, 세종시로의 인구 이동 등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지금 시청 주변 서구의 인구는 이십여만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대전시의 인구 또한 감소하고 있다. 과학도시, 경제도시,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 복거한밭이다.
50+기자단 양정숙 기자(tomymel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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